송아지 우상 숭배
김정태
2010-08-1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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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약성서의 하나님은 무섭다. “도륙,” “살륙,” 해가면서 실행되는 징계를 보면서 과연 이런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이 더 이상은 우상을 섬길래야 섬길 수가 없었겠구나 싶지만, 이러한 징계 장면의 빈번함은 당대에 결코 우상을 버리지 못했었다는 상대적 방증이기도 하다.
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의 경우다: 모세가 계명 받으러 올라간 사이 그 받을 십계 중의 제2계인 상(像) 만들지 말라는, 바로 그 계율을 어기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문란한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는 단화인데, 이러한 문맥 배치는 모세라는 율법 수여자와의 강력한 대비를 시도한다.
원래 이 문맥 배치의 의도대로라면 삼천 명의 도륙을 일으킨 이 날 부로(32: 27) 아예 송아지 ‘송’자도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할 텐데, 훗날 북 왕조의 여로보암이 다시 송아지를 만든다.
많은 이들이 다윗-솔로몬의 남 왕조를 아군으로, 북 왕조는 적군(?)으로 여기는 까닭에 저주 받는 이들이 가지고 있을 당연한 우상쯤으로 간주하지만, 사실 송아지는 여로보암뿐 아니라 솔로몬 역시 수용했다는 사실(왕상 7:25, 44)을 간과해서는 안된다.
그렇다면 남 왕조 북 왕조가 공히 수용했던 이 송아지는 대체 무엇일까? 이 송아지의 정체성은 바로 다름아닌 “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”이라는 것이다(왕상 12:25-33).
출애굽기 32장에서 이 송아지를 두고 했던 말의 반복인 셈이다. 당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여전히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 송아지라는 종교관을 못버리고 있었을까?
그것은 필경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얼굴 없는 신을 가르치는 모세의 교정과 송아지 신 사상이 병존되어 내려왔음을 시사한다. 앞서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동족상잔 비극의 날 부로 이 오판이 아주 근절된 것이라면 출애굽기 32장의 배치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. 왜냐하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송아지 신은 다름아닌 아론이 가르쳐준 것인데 정작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, 이 단화의 요점인즉 같은 제사장 가문인 아론이 가르쳐 준 것보다 모세의 가르침이 승하다는 교훈을 강조함으로써 끝을 맺기 때문이다.
다시 말하면 야웨 하나님이 그렇게 특출하게 잔인한 신이라기 보다는 그 정도로 뼈아픈 반성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 보면 맞다.
저주의 중첩인지 아니면 그 뼈저린 반성을 촉구하는 저자의 배려인지 모르지만 아론의 아들들 중 나답과 아비후라는 이름 가진 아들들이 있는데 여로보암의 두 아들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다. 나답과 아비야이다.
예를 들면 출애굽기 32장의 경우다: 모세가 계명 받으러 올라간 사이 그 받을 십계 중의 제2계인 상(像) 만들지 말라는, 바로 그 계율을 어기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문란한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는 단화인데, 이러한 문맥 배치는 모세라는 율법 수여자와의 강력한 대비를 시도한다.
원래 이 문맥 배치의 의도대로라면 삼천 명의 도륙을 일으킨 이 날 부로(32: 27) 아예 송아지 ‘송’자도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할 텐데, 훗날 북 왕조의 여로보암이 다시 송아지를 만든다.
많은 이들이 다윗-솔로몬의 남 왕조를 아군으로, 북 왕조는 적군(?)으로 여기는 까닭에 저주 받는 이들이 가지고 있을 당연한 우상쯤으로 간주하지만, 사실 송아지는 여로보암뿐 아니라 솔로몬 역시 수용했다는 사실(왕상 7:25, 44)을 간과해서는 안된다.
그렇다면 남 왕조 북 왕조가 공히 수용했던 이 송아지는 대체 무엇일까? 이 송아지의 정체성은 바로 다름아닌 “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”이라는 것이다(왕상 12:25-33).
출애굽기 32장에서 이 송아지를 두고 했던 말의 반복인 셈이다. 당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여전히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 송아지라는 종교관을 못버리고 있었을까?
그것은 필경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얼굴 없는 신을 가르치는 모세의 교정과 송아지 신 사상이 병존되어 내려왔음을 시사한다. 앞서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동족상잔 비극의 날 부로 이 오판이 아주 근절된 것이라면 출애굽기 32장의 배치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. 왜냐하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송아지 신은 다름아닌 아론이 가르쳐준 것인데 정작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, 이 단화의 요점인즉 같은 제사장 가문인 아론이 가르쳐 준 것보다 모세의 가르침이 승하다는 교훈을 강조함으로써 끝을 맺기 때문이다.
다시 말하면 야웨 하나님이 그렇게 특출하게 잔인한 신이라기 보다는 그 정도로 뼈아픈 반성이 깃들여 있는 것으로 보면 맞다.
저주의 중첩인지 아니면 그 뼈저린 반성을 촉구하는 저자의 배려인지 모르지만 아론의 아들들 중 나답과 아비후라는 이름 가진 아들들이 있는데 여로보암의 두 아들 이름이 같거나 비슷하다. 나답과 아비야이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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